실제보다 허상이 더 많은 것을 보여 주듯이 거꾸로 보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담게 하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간다는 것,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깊어져야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오랜 기억 속 징검다리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국민학교 2학년쯤이었을까? 과수원 앞, 개울 위로 무수히 날던 고추잠자리와, 징검다리 사이를 감아 흐르던 물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그 시절 친구들과 푸른날들의 시간은 다 어디로 가고 여기에 나만 홀로 있는 것일까? 신천, 돌다리 앞에서 시간의 강을 건너고 있다.

익숙한 것들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하고 사진 또한 그러하다. 늘 옆에 있는 신천이지만 '소묘(素描)'와도 같이 사각거리는 풍경이 참으로 좋다.

정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느 날, 정면으로 바라본 시간이 풍경처럼 멈춰 서 있다. 사람들의 움직임도 없고, 그  흔한 새들의 날갯짓도 없다. 어느 순간 정지한 시간이 활시위처럼 팽팽히 당겨진다. 끊어질듯한 정적이 강 위로 흐른다. 아 그러고 보니 사진의 시간도 삶도 시간도 그렇게 닮아 있다.

내게 있어서 '色'이란 봄날의 무수한 꽃잎의 흩날림과도 같고, 여름날 소나기 뒤의 무지개나 나뭇잎의 짙푸른 살결과도 같으며, 가을날 온 세상을 물들이는 단풍의 소리와 낙엽의 짙은 향기와도 같고, 겨울날 시리도록 차가운 하늘과 그 하늘 아래 쌓인 끝도 없는 흰 설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계절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저 수많은 색 중에 나만의 색을 찾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만 하다.

보이지 않을 때, 더 멀리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빌딩과, 하늘과, 그리고 다리와 먼산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것들을 넘어 석양에 빛나는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던 것들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문득 가슴이 뛰고, 나도 작은 바위처럼 아득한 봄날의 꿈을 꾼다.

성(城)으로 가는 언덕 골목길에 눈이 내린다. 사박사박 쌓이는 눈을 지나는 그녀의 빨간 우산이 골목에 가득 찼다. 문득 벽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언덕 골목에 또다시 눈만 내리고 이윽고 성으로 향하는 길도, 나도 벽화처럼 눈 속에 묻혔다.

출근길인 것일까? 신천교를 지나는 그녀의 걸음이 빠르다. 가로등 위의 비둘기들은 그녀의 바쁜 월요일 아침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고 쌓일 듯  말 듯 한 눈처럼 강바람도 그렇게 스치고 지난다.

우리의 삶이 시간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기억의 한 단면으로만 남는다. 끊어진 필름을 잇듯, 어쩌면 그 단면의 사이에 채워지는 것들은 길거나 혹은 짧은 삶에 대한 여백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신천동 그 골목의 끝자락에서 희미한 내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오후의 햇살이 골목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환각이었을까? 뷰파인더 속에서 아이는 햇살과 같았다. 햇살을 뚫고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세상이, 삶이, 좀 더 직관적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