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운 날은 그 밤의 크기만큼이나 강의 그림자가 깊어진다. 나이를 더할수록 강의 깊이는 알 수 없어지고 또 그만큼이나 낡아만 간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마치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는 것과도 같다. 때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더 명징하게 진실을 보여준다지만 새삼 이 꿈결같은 강가에 이러러서야 나는 비로소 금빛 시간의 벌레와 마주한다.
밤을 새운 날은 그 밤의 크기만큼이나 강의 그림자가 깊어진다. 나이를 더할수록 강의 깊이는 알 수 없어지고 또 그만큼이나 낡아만 간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마치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는 것과도 같다. 때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더 명징하게 진실을 보여준다지만 새삼 이 꿈결같은 강가에 이러러서야 나는 비로소 금빛 시간의 벌레와 마주한다.
소묘같이 까슬한 흑백의 시간도 이제는 보내야 할 때다. 도둑과도 같은 봄날은 사방에서 아우성인데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겪어야 다시 너를 만나게 될까? 보내는 모든 것들은 아쉬움이 남는 법이라지만 봄꽃보다 더 짙은 이 그림자는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
구름 한 조각이 마치 연기처럼 높다란 지붕 위에 걸렸다. 해 그림자 골목에 눕고 나면 밥 짓는 연기며 생선 굽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울까? 가로등 불빛 사이로 바쁜 귀가의 발걸음 너머, 온 가족 도란도란 모여않아 오래전 기억 속 그 '봄꽃' 피울 수 있을까?
택시에서 초로의 두 사람이 내렸다. 어디서 전작이 있었는지 취기를 어둠에 남기고 익숙한 모습으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득 '중국산이 아닙니다'는 어느 나라의 생수 브랜드가 떠올랐다. 시대의 역설적 표현인지, 순진무구함에 대한 차별적 전략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바보가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가 어둠보다 더 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천동 언덕 골목의 담은 높고도 짙다. 언덕의 높이만큼 삶의 흔적 또한 쌓이고 또 쌓였으리라. 나는 이 아득한 골목의 심연에서 문득 멸종한 물고기의 '화석(化石)'을 떠올린다. 그네들의 삶도, 내 사진도 언젠가 물고기의 비늘과도 같은 화석 한 조각으로 남을 수 있을까?
기억한다는 것은 현실과 과거의 사이에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 별단 다르지 않다. 미세먼지가 가득하던 어느 날, 신천의 강가에서 나는 모래처럼 반짝이던 유년(幼年)의 기억을 그렇게 한 움큼 건져 올렸다.
해가 지면 새들은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간다. 사람들도 새삼 분주한 모습으로 그렇게 하루를 걷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은 빛 자락은 더 선명한 모습으로 강 속 깊이 눕는다. '일모도원(日暮途遠)', 나 저 황혼의 끝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까?
봄이 오는가 보다. 긴 강을 지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그렇게 봄이 다가오는가 보다. 나무들이며 하늘이며 사람들까지, 이미 신천은 온통 새 계절의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시간은 언제나 떠밀려 사라져 가는 것일까? 꽃망울 터지듯이 찬란하던 청춘의 날들은 기억에 남아 있기나 할까? 아직 오지도 않은 봄이 못내 처연하다.
공간을 살아나게 하는 것은 움직임이다. 사람이든, 새든, 나뭇가지나 물결의 흔들림이든 움직임은 살아 있음을 반증한다. 어쩌면 산다는 것도 그러하다. 일상에서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그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