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비 오더니 바람이 오래도록 분다. 학교 운동장엔 아이들 하나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그려놓고 갔을까? 하늘에는 온통 장난과도 같은 그림들이 맴돌다 흩어진다.
어젯밤 비 오더니 바람이 오래도록 분다. 학교 운동장엔 아이들 하나 보이지 않고 아이들이 그려놓고 갔을까? 하늘에는 온통 장난과도 같은 그림들이 맴돌다 흩어진다.
오후의 햇살이 골목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환각이었을까? 뷰파인더 속에서 아이는 햇살과 같았다. 햇살을 뚫고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세상이, 삶이, 좀 더 직관적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이 시간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기억의 한 단면으로만 남는다. 끊어진 필름을 잇듯, 어쩌면 그 단면의 사이에 채워지는 것들은 길거나 혹은 짧은 삶에 대한 여백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신천동 그 골목의 끝자락에서 희미한 내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성(城)으로 가는 언덕 골목길에 눈이 내린다. 사박사박 쌓이는 눈을 지나는 그녀의 빨간 우산이 골목에 가득 찼다. 문득 벽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언덕 골목에 또다시 눈만 내리고 이윽고 성으로 향하는 길도, 나도 벽화처럼 눈 속에 묻혔다.
신천동 산동네 골목에 오후의 짧은 햇살이 스친다. 골목을 둘러싼 성(城)들은 날마다 자란다. 마치 여름날 담쟁이덩굴처럼 동네보다, 산보다, 더 높게 자란다.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사람들의 끝에서 그렇게 성(城)은 더 빨리, 더 크게 자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를 다녀오는 것일까? 그들이 지나간 겨울 골목에 긴 그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신천동 언덕 골목의 담은 높고도 짙다. 언덕의 높이만큼 삶의 흔적 또한 쌓이고 또 쌓였으리라. 나는 이 아득한 골목의 심연에서 문득 멸종한 물고기의 '화석(化石)'을 떠올린다. 그네들의 삶도, 내 사진도 언젠가 물고기의 비늘과도 같은 화석 한 조각으로 남을 수 있을까?
택시에서 초로의 두 사람이 내렸다. 어디서 전작이 있었는지 취기를 어둠에 남기고 익숙한 모습으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득 '중국산이 아닙니다'는 어느 나라의 생수 브랜드가 떠올랐다. 시대의 역설적 표현인지, 순진무구함에 대한 차별적 전략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는 바보가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가 어둠보다 더 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 한 조각이 마치 연기처럼 높다란 지붕 위에 걸렸다. 해 그림자 골목에 눕고 나면 밥 짓는 연기며 생선 굽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울까? 가로등 불빛 사이로 바쁜 귀가의 발걸음 너머, 온 가족 도란도란 모여않아 오래전 기억 속 그 '봄꽃' 피울 수 있을까?
성곽과도 같은 그 골목길 아래 다시 섰다. 오후의 빛바랜 햇살은 언덕 끝에서 가장 늦게 부서져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다. 저 학생이 휴대폰에서 만나는 것은 무엇일까? 햇살이 흩어져 사리진 빈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이 골목 끝에 남아있는 저 아련한 그림자는 또 무엇일까?